2022년 8월 13일 토요일

생각은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단발적이며 변화한다/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생각은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단발적이며 변화한다

 

 

 

 

우리는 생각리아는 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지속적이지 못

하고 단발적이며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변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삿된 욕망과 결부되어 일어나는 생각들을 조심스

럽게 관찰하고 예의 주시해야 한다.  만약 생각이 영원 불변하다면 그

것은 우리의 본 마음인 청정심과 다를 바가 없다.

 

큰스님께서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초창기 당신께서 수행

할 당시 마음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우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

다고 솔직히 고백하셨다.

 

여기서의 마음은 중생심이 아닌 청정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

스님의 말씀은 진실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마음은 정신을 환골탈태하여 얻어진

청정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면 생각도 깨끗한 것이다.  반대로 마음

이 탁하다면 그것은 생각도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욕구나 사고들은 우리의 본질적인 본

면목, 즉 자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옥이라는 것

은 이러한 덧없고 본질적이지 못한 삿된 욕구와 생각들에 휘말려 본질

적인 자신의 참나, 즉 본래 면목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이렇게 무상한 생각들과 수시로 치성하는 중생심

을 여실지견으로 진지하게 꿰뚫어 보고 조용히 가라앉히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빠사나선은 미혹된 생각과 정사유 및 정견을 엄

격하게 구분한다.  만약 자신이 미혹된 생각인지 그리고 정견인지를 모

른다면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모든 잡념들에게 하나의 공부감(먹이감)

을 주어 그 잡념들을 잠재운다.  위빠사나선은 바로 이렇게 수행자에게

발생하는 부질없고 무상한 생각들과 욕구들을 하나하나 알아차려 총체

적인 무지를 타파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총체적인 무지의 구름을 일소시켜 감으로써 올바른

정견과 정사유를 증득해 나가게 된다.  하지만 거해 스님께서 <<깨달음

의 길>>이란 책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위빠사나선 도중에 잡념이 치성

하게이러나면 '망상, 망상, 망상'이라고 반복함으로써 잡념을 잠재운다

고 한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으로 잡념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 쉽지

가 않다.  왜냐하면 잡념을 완전히 일소하기 위해서는 잡념의 근원인

카프마(업)에 대한 성찰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빠사나선은 올바른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

구나, 그리고 잘못된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구나를 여

실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의식을 명료하게 하

여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사실, 위빠사나선은 조용히 마음

을 가라않힌 사마타 상태에서 수행해야 제대로 된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

전해내려 온 정혜쌍수에서 정은 고요하고 맑음을 의미하는

사마타 상태를 의미하며 혜는 밝음으로서의 헤아림을 의미하는 위

빠사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위빠사나는 사마타에 기반을 두고 주도면밀하게 생각들을 관

철하여 빛의 광도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중생심이 탈각되고 번뇌의 원

인들이 하나하나 규명되어 잡연과 탁한 의식(에너지)이 제거되어 가면

자연히 오롯하게 본 성품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혼자서 위빠사나선을 수행하는 것은 위험하다.  큰스

님의 말씀대로 무릇 수행을 위해서는 큰스승을 만나야 한다.  스승이

없이 수행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불장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매우

위험한 일이므로 반드시 눈밝은 스승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우리 불

제자는 두 분의 큰스님을 모시고 있으니 더없는 복운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혼자 하다보면 치성하게 일어나는 망상을

대처하지 못해 몇 번이고 어려운 고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어떤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위빠사나선은 너무 자력에 의해서 세계의 진상을 이해하고

내면을 탐구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초래되는 당연한 문제인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잘못하면 때로는 잘못된 인연과 안 좋은 인연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다.

 

또한 위빠사나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법계(세상)와 내면의 진상

을 여실지견 파악하는 수행법이므로 너무 과도하게 몰입하면 초긴장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위빠사나선을 잘못 수행한 결과이다.  위빠사나선은 진지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항상 마음의 고요함 위에

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수행자의 내면에서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잘못된 생

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려서 그것을 올바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한

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우주적 다르마로서의 카

르마와 인연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안 좋은 생각들과 고통은 바로 악한 카르마와

안 좋은 인연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악한 카르마는 전생과 현생

의 잘못된 신 구 의 삼업이라 할 수 있으며, 안 좋은 인연은 전

생과 현생에서 빚을 진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팔정도의 정견을 구족하는 데 매우 요긴한 수행법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왜냐하면 큰스님께서도 현지사 법회에서 말씀하

신 것처럼 수행이란 칭명염불 수행, 팔정도, 그리고 육바라밀(계율 포함)

를 병행해서 함께 닦아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재세시 설

하신 팔정도는 수행의 중심부를 점위하고 있다.

 

한편 수행자 자신의 의식이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수행

법이 위빠사나선인데 만약 수행자의 의식이 미혹되면 자신은 바르지

못한 삼업을 짓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본 자성인 청정심에서 저지른

죄업이 아니라 바로 마구니나 빙의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의 전생과 현

생의 죄업에 의해 이루어진 습기, 집착, 탐  진  치 등의 중생심

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빠사나선에서 선은 사유수라고 하여 생각을 닦는 것이며

정려라고도 하여 고요히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위빠사나

명상이라고도 하는데 명상이란 바로 생각을 그윽하게 하고 깊이

참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명상함으로써 잡념의 뿌리는

사라지게 된다.

 

근래에는 미얀마 등에서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서 아라한 위를 증한

분이 있다고 회자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유를 다듬음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위빠사나선에 다가가는 분이 있다.

 

종교 명상서적들을 많이 읽고 깊이 책의 내용을 참구하는 것으로도

위빠사나선에 다가설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내부의 적'의 동태를 관

찰, 분석, 파악하여 그들을 종국적으로는 타파하여 영원히 잠재우는데

목표를 둔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운 올바른 가르침을 투명한 통

합적 사유를 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들을 타파해 나가

야 한다.  이러한 통합적 사유는 번뇌를 뿌리 채 뽑는데 큰 도움을 주

는 금세기 최고의 철학 사조이자 추세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언금한 것처럼 위빠사나선은 한계를 지닌다.

 

첫째, 위빠사나선은 아라한에 목표를 둔다.  즉, 위빠사나 수행법은

아라한 위에 한계를 둔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둘째,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지나치게 두뇌

를 긴장시켜 상기병을 일으키거나 바르지 못한 사유와 계율 중에서 특

히 음계를 준수하지 못할 경우 망상에 휘말려서 정신질환이 일어

날 수 있다.

 

따라서 옆에서 수행자를 잘 돌보아주는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 또

한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바처럼 위빠사나선의 중요성은 집중 명상을

통해서 일념삼매를 통과하고 무념삼매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위빠사나선은 아라한까지만 가능하다.  그 이상의 수행

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큰스님께서 주창하신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

행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바르지 못한 식욕, 삿된 음욕은 자신의 삿된 생각에서 비롯된다/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바르지 못한 식욕, 삿된 음욕은 자신의 삿된 생각에서 비롯된다

 

 

 

결국 바르지 못한 식욕이나 삿된 음욕은 바로 자신의 삿된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올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문제는 바로 삿된 생각이

근원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삿된 생각은 바로 중생심에서 발현되며

반대로 올바른 생각은 청정심에서 발현된다.

 

위빠사나선은 과학적 사유처럼 실험과 관찰을 무수히 많이 반복함으

로써 중생심과 청정심의 차이를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다.  큰스님의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는 이러한 중생심을 억겁을 통해 쌓아온

습기,  집착,  죄업,  탁기,  탐,  진,  치(어리석음)의 삼독심 등으로

언급하시는 것으로 안다.

 

수행이란 번뇌의 근원이 되는 이러한 중생심을 타파하고 척결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는 바, 우리가 식욕과 음욕을 느

낄 때 그것은 순간적 욕망이지 결코 영원하고 지속적인 욕망이 아니라

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덧없는 것이고 불행한 것이며 고통의 근원

이 되는 것이다.

 

욕구나 삿된 욕망은 자신의 '참나'인 본 성품, 즉 청정심과는 무관하

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모성애적 욕구를 통해

서 음욕을 일으키며,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정복욕을 통해서 음욕을

일으킨다.

 

이러한 두 가지 욕구들은 삿된 것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잘못된 욕구가 발동하는가?

 

남성들은 원시시대부터 밖에서 사냥하고 다른 부족과 투쟁하였으며

다른 부족을 정복하였다.  오늘 날에는 밖에서 사회적 생존을 위해 투

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정복욕을 여성에게도 작용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오류라고 본다.

 

한편 여성들은 원시시대로부터 남성들이 밖에서 활동한데 반하여 집

안에서 아이들을 키움으로서 모성에적 욕구를 갖게 되어 남성에 대해

서 그러한 모성애적 본능욕이 작용하는데서 오는 정신적 오류라고 알

고 있다.

 

이러한 정복욕과 모성애적 욕구는 사람들의 중생심에서 비롯된다.

반면 청정심에는 이러한 정복욕은 뛰어나고 현명한 지도력과 카리스

마, 진취적 기상, 호연지기로 그리고 모성애적 욕구는 아가페적인 사

랑, 보편애, 우주적인 사랑으로 승화된다.  왜냐하면 청정심 자체는 모

성적 욕구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정복 욕구를 통해 정복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자의 욕구는 상대적으로 남녀 서로를

끌어당겨 올바르지 못한 음욕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심의 덫에

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이라한 잘못된 욕망에 대한 여실한 통찰과 성찰을 얻

어내어 올바른 지견과 정견을 자신의 내면에 확립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의 기초는 따라서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등,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

즉 팔정도의 토대 위에서 행해진다.  부처님의 위빠사나 가르침은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칭명염불 수행처럼 동등하게 팔정도에

토대를 두고 있는 매우 수승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알아차림 -- 위빠사나선 수행법/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알아차림 -- 위빠사나선 수행법

 

 

 

 

여기서는 앞서 논급한 성과 명을 수행하는 관법으로서 위빠사

나 수행을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위빠사나선의 본질을

핵심적으로 논한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현자로 알려진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한 것처럼 알아차림이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김열권 법사가 말한 대로 보면 욕망과

잡념이 사라지게 된다.  심오한 통찰과 지속적인 주시를

통해서 번뇌와 잡념의 본질을 규명하고 그것의 뿌리를 뽑아버

리는 것이 위빠사나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미심쩍은 생각이 일어난다면 무엇인가 문제의 소

지가 자신의 환경과 주변에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위빠사나선도 휼륭한 수행법이라고

하셨으며 다만, 이 수행법을 통해서도 아라한 위 정도까지 얻을 수 있

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안다.

 

왜 아라한 위까지 얻을 수 있느냐는 위빠사나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면 된다.  사실, 위빠사나선은 생각을 다듬고 정리하고 생각을 타파하

는 수행으로서 생각에 끄달리지 않는 수행법으로서 서양철학자 헤켈이

말한바대로 절대정신을 증득하는 데 있다.  이러한 절대 정신이 바로

참나 또는 본래 면목이라는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사념처관이

라고 해서 신(몸), 수(느낌), 심(마음), 법(현상)을 있는 그대로

살펴서 참 자아, 즉 본 면목을 찾는데 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그토록 강조하신

수행의 요체는 깊은 삼매에 도달하는 것이다.  수행법은 이러한 깊이

있고 그윽한 삼매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휼륭한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깊은 삼매를 얻도록 도와주지 못한다면 그 수행법은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위빠사나선은 생각을 타파함으로써 중생심을

제거하고 내면의 공인 청정심의 본 자성을 깨어내는데 있다.  큰스

님께서는 견성의 순간을 내면의 자성이 터져나와 하늘과 땅을 뒤엎는

경지라고 설하신다.

 

큰스님의 견성에 대한 오도송은 매우 휼륭한 말씀이 아닐 수 없으며

가장 명료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삼천대천세계가 눈앞에서 허

물어지고 태평양의 물을 모두 마실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마찬

가지로 위빠사나선이 증위하는 경지도 바로 생각을 지멸하고 단멸하여

맑은 본 성품이 오롯이 두되에 깨어나와 내외명철이 되는 경지이다.

 

사실 수행을 하면 자타불이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자타불

이를 얻기 위해서는 무아를 체험해야 한다.  하지만 견성 수준에서의

무아와 아라한 수준에서의 무아 그리고 보살 수준에서의 무

아와 최고 수준인 불과에서의 무아는 그 차이를 갖고 있다.

 

즉, 욕계정삼매, 명진정삼매, 해인삼매, 대적정삼매 각각의 삼매의

심화 정도에 따라 자타불이의 경험을 다르게 느낀다는 점이다.  이는

견성을 얻은 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를 여러 번 읽어보면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위빠사나선은 바로 욕계정삼매를 넘어 명진정삼매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을 하기 전에, 즉 수행에 대한 초발심 이

전에는 주관적이고 주체적인 자신과 객관적이고 상대적인 타인과의

분명한 구분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위빠사나선을 하게 되면 보다 분명

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내면에 혼재하는 자신의 의식과 타인의 의식

들을 간파하게 된다.

 

<<능엄경>>에서는 나그네를 모두 쫓아내어 자신의 몸에 주인공이 되

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잘못된

의식과 빙의적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의 청정심을 도야하는 것

이 위빠사나선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빙의를 제거하고 불순한 영혼을 제거하는 것은 혼자서

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위빠사나선을 잘못하면 상기명, 주화입마, 청

신질환 등을 겪게 되기도 한다.  참고로, 큰스님의 바르고 청정한 칭명

염불 수행은 먼저 부처님이 주관하시는 천도대재를 지내야 한다는 것

을 명시하고 계신다.

 

따라서 큰스님께서 제시하는 수행법은 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 하에

수행되는 매우 체계적이고 부작용이 없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자

세한 내용은 칭명염불 수행에 대한 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한편 청정심은 수행자 마음의 본체로서 진실된 것이며 중생심

은 수행자 마음의 때처럼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덧없는 것이

다.  즉, 청정심은 영원한 빛이라면 중생심은 어둡고 지저분한 탁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청정심과 중생심의 구분은 삿된 욕망이라는 매개

를 통해서 구분된다.  만약 우리가 아침, 점심, 저녁 공양시간이 아닌데

무엇인가 먹고 싶고,  자녀를 두고자 하지 않는데도 음욕이 일어난

다면 그것은 올바른 욕망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식욕과 음욕은 순간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여실지견으로 통찰

해야 한다.  만약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1초의 순간이라도 끊

이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영구적으로 지속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청

정한 본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식욕이나 음욕은 모두 순간적인 만족이고 만족을 얻

으면 욕망은 잠둘어 버린다.  이러한 삿된 욕망이 바로 인간을 윤회시

키는 무지의 그물이요 어둠의 굴레이다.  참고로 큰스님께서도 <<21세

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원각경>>을 언급하시면서 음욕이 바로 윤회

생사를 일으킨다고 사자후하셨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칭명염불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불신을 얻는데 있다

 칭명염불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불신을 얻는데 있다

 

 

 

  

한편, 도가에서도 정, 기, 신을 삼보라고 하여 하단

전에 위치하여 행위와 신업을 실현시키는 정을 명으로 보

고, 반면 두뇌의 상단전에 있는 신을 성으로 비유해 볼 수 있다.

 

물론 정 자체가 명이 아니고 신 자체가 성인 것은 아니다.

 

정을 통해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신을 통해서 성을 깨우

친다.  정은 명의 원동력이며 원료라면 신은 성의 원동력이

며 원료라고 할 수 있다.

 

성과 명의 상호 작용이 중요한 것처럼, 즉 성품을 통해서 세상살이

를 깨우쳐가고 세상살이를 통해서 성품을 깨우쳐 나가는 것처럼 정

과 신도 정을 통해서 신을 각성시키고, 신을 통해서 정

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주로 외도로서의 고가

수행법을 해설한 것이다.

 

성명쌍수를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참구해 들어가면 수행자는자신의

명에 의한 행위를 통해서 세상살이를 경험하고 결국 법계의

묘리를 깨달아 나가는 것이 하나의 수행이고 반면 자신의 성에 의

한 참 사유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회광반조하여 내면의 묘

리를 깨달아 가는 것이 수행의 또 다른 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어떤 면에서 명은 육체를 지닌 우리의 인간 존재의 행동 반

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은 우리의 맑은 영혼이며 삶을 경험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주로 각각 수행자 자신의 신 구 의를 관찰

하고 인연과 카르마를 성찰함으로써 견성을 얻어가는 수행법이다. 한

편 칭명염불 수행은 석가모니부처님 성상의 양미간을 집중적으로

관하면서 석가모니불을 염송함으로써 깊은 집중을 통해 삼매에 진입해

가는 수행법이다.

 

둘 다 아즈나 차크라를 각성시키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명쌍수에서 성을 각성시키는 수행법인 것이다.

 

또한 거시적 관점에서 성명쌍수를 봤을 때 지구의 역사라는 것은 명

에 비유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를 타고 창출된 문화와 문명을

성에 비유할 수 있다.  명은 성을 깨닫기 위한 기반이 되며 성은 명

을 이해하기 위한 기반이다.

 

둘은 상부상조이며 불가분이고 상호 회통되어 있는 것이다.  고대 요

가에서는 문화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문화는 성

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은 지구의 생명을 의미하며 인류의 영혼을 의미한다.

 

한편 역사가 없이는 결코 문화와 문명이 창출되지 못하는 것처럼 문명

과 문화가 없는 역사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나의 개체로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전 과정이 의미있게 갈무리되기 위해서는 반

드시 의식이자 영혼인 성을 각성시키고 깨우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유인즉 인생의 고락과 애환이 모두 진귀한 가르침으로서 이 성

에 갈무리되기 때문이다.

 

큰스님의 성서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도 최종적으로 불과를 증

위하게 되면 사바세계에서 몸을 버리고 열반을 하게 될 때 4대 영체가

부처님 세계에 있는 자기의 불신과 하나로 계합한다고 사자후하였

다.

 

물론 큰스님의 사상의 폭과 깊이는 성명쌍수를 보다 고차원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훨씬 광대하고 심오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출처/ 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칭명염불 수행법의 이론적 토대 - 성명쌍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칭명염불 수행법의 이론적 토대 - 성명쌍수

 

  

수행자가 칭명염불 수행법에 대한 든든한 이론적 토대를 얻기 위해

서는 성명쌍수에 대해서 이해하면 좋다.  흔히 동양 철학과 동양 수행

을 하는 수행자라면 고대 성현들로 부터 전승된 성명쌍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성명쌍수란 성(성품)과 명(생명, 삶)을 함께 공부하라는 것을 학

인에게 당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이란 성품을 말하며, 성품은

마음의 자성을 말한다.  이는 또한 불성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목숨, 즉 생명을 말하며, 더 포괄적으로는 삶

이란 점에서 성품을 공부하는 것이 명을 공부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인식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주적으

로 영원하게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반면 명으로서의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 내재한 법리와 인연법 그리고 연기사상

을 통찰 및 철견하는 것이다.

 

물론 반드시 성으로서의 자성을 닦는 것이 명으로서의 삶

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래서 성과

명은 함께 닦아야 한다는 성명쌍수를 성현들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힌두의 철학 사유에서도 본질 또는 존재를 공부하는 것과 인

연 또는 관계를 공부하는 것 두 가지를 나눈다.  어느 것이 우선이고

어는 것이 차선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을

통해서 내면의 자성 세계로 회통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내면과 외면은 뻥 뚫려 내외명철이 된다.  이 내외명철

이 확연히 인식되어 자신의 인식 구조와 존재론적 세계가 하나가 될

때 내외의 벽은 허물어지고 완전히 허공과 같이 충만한 공을 철견

하게 된다.

 

인도의 쿤달리니 요가에서도 쉬바로서의 정적인 성품 의식과 샥티로

서의 동적인 육체 에너지를 이야기한다.  쉬바는 성에 해당하며 샥

티는 명에 해당한다.  성은 관조적 힘이자, 주시적 힘이자, 관찰

자로서의 힘이다.  명은 행위적 힘이자 삶의 영위자로서의 힘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불가의 팔정도에서 정견, 정사유 등은 쉬바 의식

을 도야하는 바른 길에 해당하며 정업, 정정진 등은 샥티 힘을 도야하

는 바른 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은 우리의 마음을 의미한다면 명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신 구 의 작용을 의미한다.  성은 체요 명은 용인 것이

다.  21세기 과학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시스템을 비유로 들면 프로그

램들 하나하나의 실체가 바로 성이요 그 프로그램의 행위 또는

작동이 바로 명인 것이다.

 

체와 용이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성명도 불

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마음에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염불선이나 위빠사나선이나 모두가 일차적으로 성을 도야하

는데 있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은 성을 도야하는 것을 넘어서 부처

님의 가피와 위신력으로 불신을 얻는데 있다.  큰스님의 법 세계에

서는 성이라는 것은 작은 불씨라면 불신은 태양으로 비유할 수

있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2022년 8월 11일 목요일

견성하여 깨달음을 구족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견성하여 깨달음을 구족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

 

 

 

 

 

인간이라는 존재는 중생심이 있고 삼독심이 있어 잡념과 번뇌가 수

시로 치성하게 일어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잡념과 번뇌는 그리

스 신화의 메두사 머리카락처럼 하나하나가 뱀의 형상을 지닌다.

 

물론 이는 비유이지만 번뇌가 뱀이라는 비유는 많은 수행자들 사이

에서 이야기되어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의 뱀의 형상이 잡

념이요 번뇌다.  그래서 이러한 미혹한 생각들에서 비롯되는 뱀을 모두

소거하는 것이 수행자의 임무이다.

 

수행을 열심히 해나가면 과거에 지었던 업장들이 녹아 내리고 과거

에 저질렀던 망상과 타인에 대한 증오심들이 하나하나 탈각되어 가면

서 마음은 순수하고 청정해진다.  반면 이렇게 과거에 물들었던 잡념,

번뇌, 망상, 중생심, 증오심, 삼독심 등등이 모두 지혜의 눈에 형상화

되는데 이때 뱀의 형상으로 비추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자신의 업

장을 의미한다.

 

칭명염불 수행을 지속해 나가면 부처님께서 가피와 위신력으로 항상

수행자를 보호해 주시며 결국 뱀의 형상으로 보이는 중생심의 의식(에

너지)이 사라지게 된다.  사실 번뇌와 잡념, 그리고 망상을 포함한 일체

의 중생심은 마귀들의 농간에 의해서 나타나는 불순한 의식이다.  이러

한 불순한 의식을 인간 중생의 두뇌에 심어서 그것을 먹이로 먹고 살

아가는 지저분한 의식체가 마귀라고 할 수 있다.  마귀는 본질적으로

사악하고 잔인하며 살기가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칭명염불을 하는 도중에 외부 경계에 부딪혀 망상

이나 잘못된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것에 끄달리지 말고 항상 청정한 마

음으로 '석가모니불'을 열심히 억념, 즉 간절한 마음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생각하여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행을 하기 전에는 지혜의 눈이 막히어 잡념들이 보이지 않다가,

칭명염불을 지속하면 잡념들이 지혜의 눈에 형상화된다.  그 잡념들이

바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염불 수행자의 지혜의 눈에 보이곤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뱀은 실체적인 것이며 마구니들이 그동안 수행

자의 의식을 잠식하여 번뇌와 잡념들을 주입시켜 놓았던 것들이다.

 

동시에이러한 번뇌와 잡념들은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 수행자를 괴

롭히기도 한다.  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이지만 매우 실제적이

며 번뇌와 잡념의 실체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염불선 수행자는 이러한 마구니들의 농간에 휘말리지 말고 지

혜의 눈으로 잡념과 번뇌들을 소진시키도록 정진해 나가야할 것

이다.  수행 도중 아무리 힘든 경계가 나와도 이겨내지 못할 경계는 없

다고하였다.  즉, 극복할 수 있는 고통만 주어진다는 것이 우주 대자

연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혼자서 이겨내려고 하지말고 부처님

의 명호를 지성으로 염송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생각을 단멸시키는 것이 불가의 수행이라는 것은 익히 많은 고

승들에 의해서도 주창되어 왔다.  스즈끼 순류 선사도 <<선심초심

>>이라는 책에서 모든 문제가 생각이 일어남으로써 맑은 마음을 어

지럽게 하는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생각을 지멸시키고 본 성품을 밝히는 것이 모든 수행의 일

차적 관문이라면 어려운 코스를 돌아서 갈 것이 아니라 쉬운 길을 선

택하는 게 지혜로운 수행자가 아닐까?

 

큰스님의 칭명염불 수행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빠른 시일 내에

거의 부작용 없이 공과를 증득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는 것을 우

리는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재차 강조하지만 큰스님이 알려주신 칭

명염불 수행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가피와 위신력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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