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3일 토요일

생각은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단발적이며 변화한다/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생각은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단발적이며 변화한다

 

 

 

 

우리는 생각리아는 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순간적이고 지속적이지 못

하고 단발적이며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변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삿된 욕망과 결부되어 일어나는 생각들을 조심스

럽게 관찰하고 예의 주시해야 한다.  만약 생각이 영원 불변하다면 그

것은 우리의 본 마음인 청정심과 다를 바가 없다.

 

큰스님께서도 <<21세기 붓다의 메시지>>에서 초창기 당신께서 수행

할 당시 마음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우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

다고 솔직히 고백하셨다.

 

여기서의 마음은 중생심이 아닌 청정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

스님의 말씀은 진실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은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마음은 정신을 환골탈태하여 얻어진

청정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면 생각도 깨끗한 것이다.  반대로 마음

이 탁하다면 그것은 생각도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욕구나 사고들은 우리의 본질적인 본

면목, 즉 자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옥이라는 것

은 이러한 덧없고 본질적이지 못한 삿된 욕구와 생각들에 휘말려 본질

적인 자신의 참나, 즉 본래 면목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이렇게 무상한 생각들과 수시로 치성하는 중생심

을 여실지견으로 진지하게 꿰뚫어 보고 조용히 가라앉히는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위빠사나선은 미혹된 생각과 정사유 및 정견을 엄

격하게 구분한다.  만약 자신이 미혹된 생각인지 그리고 정견인지를 모

른다면 그것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큰스님의 칭명염불선은 모든 잡념들에게 하나의 공부감(먹이감)

을 주어 그 잡념들을 잠재운다.  위빠사나선은 바로 이렇게 수행자에게

발생하는 부질없고 무상한 생각들과 욕구들을 하나하나 알아차려 총체

적인 무지를 타파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총체적인 무지의 구름을 일소시켜 감으로써 올바른

정견과 정사유를 증득해 나가게 된다.  하지만 거해 스님께서 <<깨달음

의 길>>이란 책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위빠사나선 도중에 잡념이 치성

하게이러나면 '망상, 망상, 망상'이라고 반복함으로써 잡념을 잠재운다

고 한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으로 잡념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 쉽지

가 않다.  왜냐하면 잡념을 완전히 일소하기 위해서는 잡념의 근원인

카프마(업)에 대한 성찰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빠사나선은 올바른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

구나, 그리고 잘못된 생각이 일면 이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구나를 여

실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의식을 명료하게 하

여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사실, 위빠사나선은 조용히 마음

을 가라않힌 사마타 상태에서 수행해야 제대로 된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가에서

전해내려 온 정혜쌍수에서 정은 고요하고 맑음을 의미하는

사마타 상태를 의미하며 혜는 밝음으로서의 헤아림을 의미하는 위

빠사나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위빠사나는 사마타에 기반을 두고 주도면밀하게 생각들을 관

철하여 빛의 광도를 높여나가는 것이다.  중생심이 탈각되고 번뇌의 원

인들이 하나하나 규명되어 잡연과 탁한 의식(에너지)이 제거되어 가면

자연히 오롯하게 본 성품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혼자서 위빠사나선을 수행하는 것은 위험하다.  큰스

님의 말씀대로 무릇 수행을 위해서는 큰스승을 만나야 한다.  스승이

없이 수행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불장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매우

위험한 일이므로 반드시 눈밝은 스승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우리 불

제자는 두 분의 큰스님을 모시고 있으니 더없는 복운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혼자 하다보면 치성하게 일어나는 망상을

대처하지 못해 몇 번이고 어려운 고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어떤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위빠사나선은 너무 자력에 의해서 세계의 진상을 이해하고

내면을 탐구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초래되는 당연한 문제인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잘못하면 때로는 잘못된 인연과 안 좋은 인연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다.

 

또한 위빠사나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 법계(세상)와 내면의 진상

을 여실지견 파악하는 수행법이므로 너무 과도하게 몰입하면 초긴장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위빠사나선을 잘못 수행한 결과이다.  위빠사나선은 진지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항상 마음의 고요함 위에

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위빠사나선은 수행자의 내면에서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잘못된 생

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려서 그것을 올바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한

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우주적 다르마로서의 카

르마와 인연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안 좋은 생각들과 고통은 바로 악한 카르마와

안 좋은 인연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악한 카르마는 전생과 현생

의 잘못된 신 구 의 삼업이라 할 수 있으며, 안 좋은 인연은 전

생과 현생에서 빚을 진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팔정도의 정견을 구족하는 데 매우 요긴한 수행법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왜냐하면 큰스님께서도 현지사 법회에서 말씀하

신 것처럼 수행이란 칭명염불 수행, 팔정도, 그리고 육바라밀(계율 포함)

를 병행해서 함께 닦아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재세시 설

하신 팔정도는 수행의 중심부를 점위하고 있다.

 

한편 수행자 자신의 의식이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수행

법이 위빠사나선인데 만약 수행자의 의식이 미혹되면 자신은 바르지

못한 삼업을 짓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본 자성인 청정심에서 저지른

죄업이 아니라 바로 마구니나 빙의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의 전생과 현

생의 죄업에 의해 이루어진 습기, 집착, 탐  진  치 등의 중생심

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빠사나선에서 선은 사유수라고 하여 생각을 닦는 것이며

정려라고도 하여 고요히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위빠사나

명상이라고도 하는데 명상이란 바로 생각을 그윽하게 하고 깊이

참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명상함으로써 잡념의 뿌리는

사라지게 된다.

 

근래에는 미얀마 등에서 위빠사나 명상을 통해서 아라한 위를 증한

분이 있다고 회자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유를 다듬음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위빠사나선에 다가가는 분이 있다.

 

종교 명상서적들을 많이 읽고 깊이 책의 내용을 참구하는 것으로도

위빠사나선에 다가설 수 있다.  위빠사나선은 '내부의 적'의 동태를 관

찰, 분석, 파악하여 그들을 종국적으로는 타파하여 영원히 잠재우는데

목표를 둔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배운 올바른 가르침을 투명한 통

합적 사유를 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들을 타파해 나가

야 한다.  이러한 통합적 사유는 번뇌를 뿌리 채 뽑는데 큰 도움을 주

는 금세기 최고의 철학 사조이자 추세이기도 하다.

 

이전에도 언금한 것처럼 위빠사나선은 한계를 지닌다.

 

첫째, 위빠사나선은 아라한에 목표를 둔다.  즉, 위빠사나 수행법은

아라한 위에 한계를 둔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한다.

 

둘째,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지나치게 두뇌

를 긴장시켜 상기병을 일으키거나 바르지 못한 사유와 계율 중에서 특

히 음계를 준수하지 못할 경우 망상에 휘말려서 정신질환이 일어

날 수 있다.

 

따라서 옆에서 수행자를 잘 돌보아주는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 또

한 큰스님께서 설법하신 바처럼 위빠사나선의 중요성은 집중 명상을

통해서 일념삼매를 통과하고 무념삼매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위빠사나선은 아라한까지만 가능하다.  그 이상의 수행

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큰스님께서 주창하신 현지사의 칭명염불 수

행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출처/깨달음을 넘어 붓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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